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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광주와 서울, 도시가 남긴 상처

by 오가닉그로스 202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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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포스터

1999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개인의 기억과 공간을 통해 그려낸 수작입니다. 광주와 서울이라는 도시 배경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규정짓고 그 상처를 증폭시키는 결정적 요소로 기능하며, 한국 사회의 집단 기억을 조망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합니다.

광주, 기억의 단면이 된 도시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는 1980년 광주에서 신참 군인으로 복무하며 결정적 변화를 겪습니다. 그가 겪은 트라우마는 영화 전체의 정서와 인물의 붕괴를 지배하며,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상처가 응축된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광주는 단순한 사건의 배경이 아닙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도시를 통해 한국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기억, 즉 집단적 트라우마를 드러냅니다. 김영호는 광주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간성을 잃고, 이후 그는 형사로서 폭력을 정당화하고, 결국 무너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광주에서의 체험은 단순히 한 인물의 전환점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시스템적으로 파괴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특히 김영호가 광주에서 여학생에게 총구를 겨누고 겁에 질린 눈빛으로 뒷걸음질 치는 장면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게 하며, 그 순간부터 그는 되돌릴 수 없는 길에 들어선다는 암시로 작용합니다. 광주는 곧 김영호의 과거이자 죄책감의 공간, 용서받지 못한 기억의 지리적 장소입니다.

광주라는 도시는 한국 사회에서 오랜 시간 말해지지 못했던 이야기의 공간이자, 영화 속 김영호와 같이 수많은 ‘이름 없는 가해자들’이 만들어낸 상처의 상징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 공간에 윤리적 질문을 새기며, 관객으로 하여금 단지 한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합니다.

서울, 일상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고립

반면 서울은 김영호의 일상과 사회적 역할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안정이나 회복의 장소가 아닙니다. 서울은 그에게 끊임없는 무력감, 자기부정, 고립감을 심어주는 현대적 상실의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특히 1990년대 서울의 배경은 개발과 자본, 속도 중심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김영호는 경찰이 된 후, 폭력적인 수사관으로 변모하며 타인을 제압하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도피합니다. 그는 범죄자를 향한 폭력에서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 행위는 그에게 남은 인간성마저 갉아먹습니다. 서울에서의 삶은 겉보기에 정상적이지만, 실상은 감정이 단절된 상태이며, 사랑과 우정조차 불가능한 공간이 됩니다.

이창동 감독은 서울의 풍경을 차갑고 회색빛으로 묘사하며, 도시가 주는 익명성과 소외를 강조합니다. 김영호는 인간관계 안에서 고립되고, 서울의 일상은 그에게 더 이상 삶의 희망이나 소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는 도시의 물리적 중심에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며, 결국 철로 위, 끝의 공간으로 향하게 됩니다.

서울은 그래서 단지 배경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의 감정 지형도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경쟁과 단절, 소비와 무관심 속에서 인물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그 결과가 최후의 장면으로 이어지며, 서울 역시 광주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붕괴에 기여한 ‘또 하나의 공범’으로 자리합니다.

공간이 만든 사람, 도시가 남긴 상처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 구조 속에서, 각 시기마다 주인공이 위치한 공간의 상징성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광주와 서울, 두 도시는 단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김영호의 삶과 기억, 상처의 결정체입니다. 각각의 도시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지 않고,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기억의 덫으로 작용합니다.

김영호는 광주에서 죄의식을 얻고, 서울에서 감정을 상실합니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고립시키며, 결국 그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절규를 마지막으로 철길 위에서 사라집니다. 이 장면은 도시 공간이 개인에게 남기는 흔적과 폐해, 그리고 그것이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창동 감독은 도시와 기억의 관계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공적·사적 트라우마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박하사탕 속 도시들은 인물의 감정 상태를 대변하고, 시대와 역사 속 인간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시각적으로 재현합니다.

오늘날에도 광주와 서울은 여전히 정치적 의미와 상징을 지닌 도시이며, 박하사탕은 그 상처를 가장 영화적으로 풀어낸 사례입니다. 이 영화는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며, 우리가 과연 그 기억과 장소를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결론

영화 『박하사탕』에서 광주와 서울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주인공 김영호의 심리와 삶을 형성한 결정적 장소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도시를 통해 기억과 트라우마, 개인과 역사 사이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그려냅니다. 도시가 남긴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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