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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리뷰 (광기, 권력, 인간성)

by 오가닉그로스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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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남자 포스터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작품 ‘왕의 남자’는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권력과 광기, 예술과 인간성의 복합적 충돌을 그린 한국 영화사의 문제작입니다. 2025년 지금 다시 보아도 그 파급력은 여전하며, 고전의 품격과 정치적 메시지를 동시에 지닌 한국형 사극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권력과 광기의 경계, 연산군이라는 인물

‘왕의 남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단연 연산군입니다. 영화는 조선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군주를 단지 폭군으로만 그리지 않고, 광기와 고통, 사랑과 외로움이 혼재된 인물로 재해석합니다. 이는 단순한 연산군의 ‘인간화’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시스템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변질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서사 장치입니다.

연산군(정진영 분)은 처음부터 무자비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대를 처음 접할 때는 즐겁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가 느끼는 불안, 권좌를 지키기 위한 두려움,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집착이 점점 통제할 수 없는 폭력성으로 이어지며, 관객은 권력의 본질을 직시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점은, 연산군을 악의 화신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가진 존재로 그려낸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공길(이준기 분)에게 집착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고립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심리는 권력을 가진 자의 고독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연산군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서, 현대적 정치권력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존재로도 읽힙니다. 통치와 감정의 충돌, 공포의 정치가 어떻게 시작되고 정당화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를 던집니다.

광대의 시선으로 본 권력 – 풍자의 힘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궁중과 권력을 광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장생(조승우 분)과 공길(이준기 분)은 유랑극단 출신으로, 연극과 재담, 익살로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연산군 앞에서 펼치는 ‘왕 풍자극’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서, 권력을 비웃고 해체하는 저항의 언어가 됩니다.

영화 초반, 이들은 궁궐 밖에서 연산군을 풍자하며 관객의 박수를 받고, 곧바로 금군에게 끌려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연산군은 그 풍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광대들을 궁궐로 끌어들입니다. 이 지점은 권력이 대중의 웃음을 이용해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오락화하는 권력의 이중성을 상징합니다.

장생은 거칠고 현실적인 인물이며, 공길은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권력의 이면에 점점 침잠해가는 인물입니다. 이 두 인물은 각각 예술의 현실성과 순수성을 상징하며, 영화 내내 대립하고 교차합니다. 이들이 연산군과 얽히며 벌어지는 감정의 서사는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닌, 예술과 권력, 자유와 억압, 진심과 거래 사이의 복잡한 줄다리기입니다.

광대가 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연극을 통해 감정을 흔드는 장면들은 예술이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연극은 누군가를 웃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진실을 드러내는 칼날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성에 대한 질문 

‘왕의 남자’는 단지 역사극이나 정치극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영화의 감정적 무게 중심은 장생과 공길 사이, 그리고 연산군과 공길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감정의 흐름에 있습니다. 이 감정은 단순한 동성 간의 사랑이나 삼각관계로 축소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욕망과 소속감, 애정과 거절의 총체적 구조로 읽힙니다.

장생은 공길을 오랜 동료로 생각하며 끊임없이 지켜주려 하지만, 공길은 점점 연산군의 세계로 끌려가고,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합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질투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 관계가 무너질 때 느끼는 상실과 분노를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영화 후반, 공길이 결국 장생과 함께 무대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마지막 연극을 펼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장면은 예술이 삶보다 길다는 고전적 명제를 재현하며, 죽음을 앞두고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광대의 존엄을 보여줍니다.

‘왕의 남자’는 연애영화도, 동성애 영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 감정이 권력과 어떻게 부딪히는가에 대한 영화입니다. 인간성은 권력보다 더 연약하고, 때로는 더 강인합니다. 그 두 가지 양면성을 이 영화는 깊은 시선으로 포착합니다.

결론

‘왕의 남자’는 지금 다시 보아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광기 어린 권력, 진실을 비추는 예술, 얽히고설킨 인간의 감정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단순한 고전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 지금 이 시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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