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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 (연대, 본질, 질문)

by 오가닉그로스 202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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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포스터

이준익 감독의 2021년 영화 『자산어보』는 단순한 사극이나 전기영화를 넘어선 작품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과 흑산도 어부 창대의 만남과 교류를 중심으로, 영화는 지식과 삶, 계급과 평등, 자연과 인간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사유적 태도로 풀어낸다.

특히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흑백 촬영이라는 과감한 형식 실험을 통해 시청각적 자극보다 본질적 메시지 전달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2025년 현재, 왜 『자산어보』를 다시 봐야 하는지, 그리고 그 흑백 화면 속에 담긴 철학적 깊이를 함께 짚어본다.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 – 공부의 연대

정약전(설경구 분)은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에 유배된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그는 기존 유학 중심의 학문 체계를 벗어나, 실용적 지식과 관찰을 중시한 학문을 추구하며, 어류 도감을 집필한다. 하지만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정약전은 어부 창대(변요한 분)와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은 영화의 핵심 줄기를 이룬다.

처음에는 명백한 위계가 존재한다. 정약전은 상류 지식인이고, 창대는 하층민 어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게 배우며 점점 관계의 성격이 바뀐다. 창대는 “학문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나도 배울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계급과 교육의 경계를 허문다.

“선비가 어부에게 배우고, 어부가 선비에게 배우는 것. 그 자체가 실학의 실천 아닐까?” — 영화 속 정약전의 시선

이러한 연대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를 넘어서는 지식 민주주의의 시작이며, 동시에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육의 철학적 물음이다.

흑백이라는 대담한 선택 – 본질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든 이유에 대해 “본질에 다가가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단지 시대적 고증 때문이 아니다. 흑백은 시청자의 감각을 정제하고, 과잉된 자극이 아닌, 감정과 메시지에 집중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다.

흑백이 만들어낸 감정의 여백:

  • 흑산도의 바다, 바람, 갈대밭 – 자연의 거대함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 인물의 옷, 얼굴빛, 표정의 미묘한 변화 – 컬러보다 더 깊은 집중을 유도한다.
  • 밤과 낮, 해무와 파도 – 극단적 명암 대비로 감정의 파고를 시각화한다.

특히 흑백은 계급과 권력의 외적 상징을 흐릿하게 만든다. 양반과 상민의 옷은 더 이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인물의 말투, 태도, 생각이 중심이 된다.

이는 시청자에게 “무엇을 보는가”보다 “어떤 태도로 보는가”를 묻게 만든다. 이런 미학적 전환은 단순한 미술적 기교가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중심 가치인 '평등'과 '사유'를 시각화한 방식이다.

서사보다는 문답 – 질문으로 쌓아올린 이야기

『자산어보』는 전통적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악당도 없고, 반전도 없다. 대신 영화는 정약전과 창대의 문답, 그리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변화와 공감의 시간을 따라간다.

영화 속 인상적인 문답 예시:

“배움이 왜 저 같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까?”
“지식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자연을 관찰한다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러한 문답은 단순한 대사를 넘어,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서사의 구조 자체를 구성한다. 질문은 무언가를 밝히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장치다.

정약전은 창대를 통해 ‘실용적 지식’과 ‘삶의 현장’이 갖는 가치를 깨닫고, 창대는 정약전을 통해 ‘질문하는 태도’와 ‘학문적 사고’를 배운다.

이 교차적 성장 서사는 양방향 교육, 그리고 삶과 학문의 융합이라는 현대적 교육 철학과도 연결된다.

결론 – 지금, 왜 자산어보인가

2024년 지금, 『자산어보』를 다시 꺼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 지식은 특권이 아니라 공유의 대상이다.
  • 사유는 느림 속에서 피어난다.
  • 차이와 위계는 서로를 이해하는 문을 열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정약전은 말없이 창대의 삶을 바라본다. 그 눈빛 안에는 존중, 감탄, 고마움, 깨달음이 담겨 있다. 말보다 깊은 시선 하나로 모든 감정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자산어보』는 그런 영화다. 시끄럽지 않지만, 조용히 마음속에 오래 남는 영화.

당신도 지금, 이 흑백의 질문 앞에 멈춰 설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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